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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만년필

by PJaycee 2018. 11. 10.

신임 학회장님이 이사진들에게 임명장과 함께 선물을 하나씩 주었다.

열어 보니 각자의 이름이 프린트된 만년필이다.

재무이사님이 학회 재정에도 신경 써 달라고 회장님에게 농을 섞어 한 마디 던지는데

그새 누가 살짝 검색해 보여 주는 것이 한 5만 원 정도 하는 건가 보다.




만년필이라...


생각 난 김에 내 사무실 서랍과 필통을 열어보니 파카, 워터맨, 라미 등, 여러 브랜드 만년필 4개가 나온다.

집에도 몇 개 있을 텐데, 내 돈 주고 산 건 하나도 없지만 검색해 보니 지금 신품으로는 15만 원이 넘는 것도 있다.



우리 또래에 공부나 문서 작업을 업으로 해 본 사람은 필기구에 대해 정도차는 있어도 애착이 있을 것이다.

난 주로 샤프에 까탈스러웠는데(시기 별로 한 종류에 집착했었다), 만년필은 개인 취향에 무관하게

보편적 아이템으로서 졸업 입학 시즌에 누군가는 하나 선물해 주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받으면 기분은 좋되 쓸모는 별로 없었다.

(누군가는 이게 고급 선물의 본질이라고 하긴 하더라만)


내가 손글씨를 불태운 시기는 전공의 때였는데, 환자 차트 등 온갖 문서 작업에 볼펜 한 개가 2주를 못 갔다.

판촉물로 좋은 볼펜을 주는 회사가 있으면 가서 눈치 보며 한 움큼 집어오곤 했다.

이렇게 손글씨 수요가 많을 때는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거나 카트리지 갈아가며 쓸 여유가 안 되었다.


시대가 바뀌어 전자 차트가 보편화되고 논문도 워드 없이 쓸 수 없게 된 지금은 키보드가 예전 필기구다.

(매월 업무가 이동되는 우리 젊은 전공의들 중에는 개인 키보드를 가지고 다니는 친구들이 꽤 있다.)

이런 손글씨 급감 시대에도 만년필의 용도는 애매한데, 나의 경우 일필휘지로 글 쓸 일이 없어서인 것 같다.

뭔가를 쓰고 한참 생각하거나 논의하다 다시 쓰려고 하면 그새 잉크가 말라 여러번 끄적여야 되는 만년필이 불편하다.



한참 갖고 보다가, 학회장님에게 받은 만년필은 그대로 다시 포장하여 책상 서랍 깊이 넣어 두었다.

예전 만년필들도 꺼낸 김에 말라버린 잉크와 컨버터를 씻고 말려서 다시 넣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가장 괜찮은 한 개는 다시 잉크를 채워 보았다.


이제 내게 만년필의 가장 큰 용도는 추억의 소환 정도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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