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간간이 저녁을 먹고 나서 동네를 한바퀴씩 돌았었다.
작년에는 혜화역 쪽 으로 나서 이화동, 원남동을 거쳐 병원으로 오는 짧은 순환 경로로 정해놓고 다녔었는데
올해 가을에는 다양한 길, 특히 혜화동과 동숭동 뒷 골목의 작은 골목 골목을 걸어다니고 있다.
지난 8월 14일, 친구 K가 갑자기 표가 생겼다고 같이 보자고 해서 코미디 공연을 같이 보았었는데
그 때, 옆으로 지나 다니기에 익숙했던 LG 슈퍼 건물의 지하에 공연이라는 낯선 목적으로 들어가면서 문득,
내가 이곳에서 20년을 보냈는데 정말 이 동네에 관해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 살던 곳은 작은 동네에 불과했(겠)지만, 오지나 대양, 심지어 우주를 탐험하는 흥분으로
간간이 자전거로 낯선 골목길을 누비던 기억이 새삼 떠 올랐다.
그로부터 2개월여, 나는 저녁 먹고 틈날 때마다 30-40분 정도 혜화동과 동숭동, 그리고 성균관대 앞까지
작은 골목들을 누비는 것을 간간이 하는 저녁식사 후 산책의 코스로 삼았다. 동숭동의 작은 골목길을 거쳐
서울 성곽길도 가 보았고, 처음으로 저 언덕 위에 서울 신학교와 빌라들 간의 위치 관계도 알았다.
개원기념일이 주중 휴일로 보석같이 빛나는 날, 다음 날의 휴일을 여유 삼아 좀 멀리 성북동을 올랐다.
혜화 파출소 옆길로 옛 서울시장 공관을 향해 올라가는 길.
예전 외방선교회 신부님들께서 우리 동아리를 지도해 주시던 시절 신부님들을 좇아 가끔씩 선교회 본부를
방문할 때 다녔던 길이었음이 기억의 저 밑바닥에서 떠 올랐다. 그것이 96년에서 98년 사이의 일이다.
봉사를 마치고 가던 식당인 목동, 가끔씩 별미를 찾아 들렀던 식당인 혜화칼국수 등,
대개의 랜드마크와 길들은 지난 20년간 변화가 없었다. 재능교육 건물 건너편에 큰 재능문화센터라는
조금은 이질적인 큰 건물이 들어선 것만 빼면.
서울시장 공관은 리모델링 공사 중이라는 안내와 함께 건축폐기물이 쌓여 있고 건물도 비계와 커버로
둘러싸여 있었다. 어릴 적 대구 봉덕동에 귀신이 나온다고 하던 집의 느낌이 문득 느껴졌다.
건물을 끼고 도니 축대 윗길로 연결되었다. 역시 변함이 없다. 축대 아래에는 한옥 건물의 지붕들이
주욱 펼쳐졌다. 대학 시절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즐기다가, 신부님의 집인 선교회 본부로 가서
한잔 더하자며 따라 가다가 이곳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올라가던 기억이 떠 올랐다.
그 때의 신부님, 나의 대자, 나의 선후배들은, 그 사람은 있으되 그 존재는 기억에만 있을 뿐이다.
예전 선교회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곳에 선교회 집은 없었다. 기억이 잘못되었나...
그런데 조금 더 위로 올라가자, 현대식으로 지은 큰 건물이 하나 있고 거기 간판이 붙어 있었다.
예전 선교회 본부는 그냥 큰 가정집이었었는데... 아마도 새로 지어 올렸나 보다.
몇 년 전 내게 연락해 외방선교회에 관심을 좀 가지라고 하시던 김 신부님이 떠올라 살짝 죄책감이 일었다.
건물을 돌아 내려가니 성북동 주민센터가 나오고, 이어 라파엘 클리닉 쪽으로 돌아 나왔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20여 년을 지내면서 한번도 가 보지 않았던, 불과 40-50 미터 거리에 불과한
언덕길을 올라 있는 곳에 위치한 혜화문 앞을 가 보기도 했다.
거의 한 시간여에 이르는 긴 저녁 산책을 마치고 다시 들어 오면서 사진을 찍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워서 잘 나오지는 않았겠지만, 언제 또 그 곳을 가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불과 한 시간의 여유가 그렇게 쉽게 생기지는 않으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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